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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0 13:21 시가내게로왔다




<묵화(墨畵)>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전율을 느꼈습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읽게 된 이 시는, 시를 더 좋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김종삼 시인의 ‘묵화’, 이 시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짧은 몇마디의 묘사만으로 충만한 그림 한 폭을 완성해냈습니다. 그림을 보며 저는 세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 고단한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과 고마움, 그리고 외로움입니다. 


할머니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은 소 한 마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소도 늙었겠지요. 소는 할머니 대신 밭일을 하고 할머니는 그런 소가 고맙습니다. 소를 의지해 살아가는 할머니의 삶은 외로움이 팔할, 안도감이 일할, 고마움이 일할일지도 모릅니다. 그 외로움과 안도와 고마움이 짧은 시 속에서 간결하게 전달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열대야가 시작된 며칠 전 밤, 끈적한 밤공기에 잠을 뒤척이다가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묵화’를 펼쳐 읽고, 다음 장, 다음 장을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시집을 덮고 가슴을 쳤습니다. 목이 매이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시가 있었거든요. 어느새 묵화는 잊어버리고 이 시를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술래잡기>


심청일 웃겨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 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하던 애들은 안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한동안 서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심청의 발과 다리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상상해보았습니다. 만약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심청의 나이가 열 살 또는 열세살 정도밖에 안된 아이라면. 


심청은 오랜만에 또래 아이들과 깔깔 웃으며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혀서 술래가 되었고, 눈을 가리게 되었죠. 


눈을 가리고 한걸음 발을 떼려는 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발을 떼기 망설여지는 순간, 아버지 심봉사는 매일매일 이렇게 불안하게 발을 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아버지의 슬픔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심청의 슬픔이 되는 순간, 짧은 순간 심청의 마음 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감정들과 깊숙이 들어앉는 감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순간이 ‘한동안 서 있었다’는 문장으로 완성되었고, 심청의 슬픔은 기쁨과 대조되면서 더 큰 슬픔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심청을 떠올리며 내 안에도 스쳐가는 감정, 그리고 내려앉는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몸짓에 깃드는 인간의 감정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를 찡그리게도 하고, 웃게도 하고, 걷게도 하고, 멈추게도 하는 감정. 


하지만,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감정을 속이고 살 때가 많습니다. 감정을 속이는 것을 어른다움과 성숙함으로 여기곤 합니다. 감정이 멈추었지만 몸은 움직이고, 감정이 움직이지만 몸은 멈춘 채요.


김종삼의 시는 여백의 시로 사랑받아왔습니다. 김종삼 시인의 여백은 완벽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백이 아니라, 여백을 통해 전달되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오늘 깨달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여백은 어느만큼일까요. 책임과 의지와 생각으로 꽉꽉 채워놓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 말입니다. 


황동규 시인은 <북치는 소년>의 해설 첫머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여백이 완벽보다 더 꽉 차 보이는 때가 있다. 잘 짜인 일상 가운데서 일부를 떼어내어 거기 달려 있는 창에 창호지를 발라 안이 보이게 한 후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쾌감이 있는 것이다. 그 쾌감에는 반성을 거부하는 어떤 것이 들어 있다.’ 


반성을 거부하는 어떤 것. 저는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의미가 있는 가장 솔직한 어떤 것,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 그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지 않고서 우리는 감정을 다룰 수 없습니다. 감정을 인정할 때 나는 나다워질 것 같습니다. 


가벼운 솔직함이든 묵직한 솔직함이든, ‘내 감정에, 내 어두움에 솔직해지자’고 점점 나이들어가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 나다워질때의 쾌감을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저의 개똥철학입니다. 





posted by 무엇을 꿈꾸는가... 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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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7 09:47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지난주 이수진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이는 자기 인생의 전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지난주 김준희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이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가 시험 0점을 맞아오더라도 0점을 맞은 이유를 알아보라’고 하셨죠. 지난 9월에는 채현국 할아버지의 명강의를 들었습니다. ‘남의 생각을 제 생각인냥 착각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꾸중하셨습니다. 그에 앞서 정혜신 박사님으로부터 ‘100만평의 울타리를 쳐주어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데 필요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노워리 상담넷의 상담위원들과 정기 스터디 모임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자기주도학습’에 대한 토의였습니다. 김포에서 아이들과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살고 있는 지미영 선생님께서 그동안의 경험과 배움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사실 자기주도학습은 성인의 평생학습 개념 중 하나이고, 실제 이것이 가능한 성인은 6%도 채 안된다는 사실. 성인도 이러한데 아이들은 과연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할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기주도'학습'과 자기주도'력'은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주도력은 커리큘럼이나 프로그램, 플래너에 의해 길러지지 않는다. 자기주도성은 학습에만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단기간에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길러지는 자기주도력이어야 한다. 단순히 '공부'라는 영역만 들여다봐선 안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마침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이 생각났습니다. 제목도 <자기결정>이라는 책입니다. 자기주도, 자기결정... 뭔가 비슷하죠?^^ 독일 철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페터 비에리가 쓴 책입니다. 100페이지가 넘지 않아 부담이 적지만, 한문장 한문장 곱씹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이 책을 심리학 책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처세술에 가까운 가벼운 심리학 책들보다 훨씬 더 깊이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의 갈등에 대해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안내하는 바의 의미를 잘 따라가다보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페터 비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험과 자아상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에게는 자기 결정력이 없습니다.”(<자기결정>, p.67)


경험과 자아상이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책에서는 자기 인식의 과정과 자아 성숙의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페터 비에리가 말하는대로, 나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나의 정체성을 성숙시켜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험▶기억▶이야기하기▶이해하기▶제 삼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나를 새롭게 인식하기▶새로운 차원의 나로 성숙해감 


인식과 이해의 과정 중에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을 찾아내고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나를 괴롭히던 감정의 문제, 상처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토대 위에서 자신을 세워가는 과정입니다. 사실, 이 과정이 자기성찰의 과정이고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이죠... 이 과정에서 자기결정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반추해 새로운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인식을 한 후에야 인간은 다양하게 새로운 선택지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을 부모가 절대 대신 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경험과 기억에 대한 해석을 부모가 부모의 관점으로 만들어서 주입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는 스스로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고 그것을 외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바른 해석인지 검토하고 점검하면서 자기 자신의 욕구와 감정과 능력을 시험대에 올려 진짜 자기 것을 가려내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야 아이들은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주도, 자기주도... 언젠가부터 지겹도록 듣는 이 말의 이면에는 사실, 공부보다 더 넓은 삶의 세계(그래서 어쩌면 공부와는 무관하다고도 할 수 있는)에 대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두가 공부라는 영역에 국한해서, 심지어는 입시를 위한 하나의 스펙으로 여기면서 아이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자기주도는 자신을 잘 아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힘입니다. 내가 어디까지는 나아갈 수 있고 어디까지는 나아갈 수 없는지, 내가 무엇은 좋아하지만 무엇은 싫어하는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등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확신이 없다면 공부를 하는 방법에서도 진로와 진학을 선택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자기주도는 절대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해보지 않은 아이들이 자기의 힘의 영역을 알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도전으로 실패해보지 않은 아이들이 무엇이 자신을 두렵게 하는지 알 리가 없습니다.(이런 점은 그동안 샤바누님이 쓰셨던 여러 글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사교육탈출 2강에서도 이수진 선생님이 채건이의 이야기를 잠깐 해주셨지요. 고등학교 시절 언스쿨링을 선택했던 채건이가 언스쿨링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스쿨링을 경험한 이후로 새로운 일을 앞두고서 ‘겁을 안내도 되겠구나’하는 것을 배웠다구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떨리는 마음이지만 과감하게 선택해봄으로써, 이 아이는 또다른 새로운 길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 앞에서 고민을 덜 하게 되었다는 것은, 한 평도 안되는 책상 앞에서만 자기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에 비하면 매우 놀라운 성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령,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경험과 기억과 이해는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공부의 경험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의 진짜 능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는 그 깨달음을 오롯이 나에게만 적용해야 하는 법인데, 혼자 읽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이곳의 부모님들과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성인이 된지 몇십년이 지난 우리 자신들도 계속해서 자기 인식을 해나가야 하고 또 그 경험을 통해 자녀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 경험이 강의와 책을 통해 배운 것을 자녀들에게 전달할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듭니다. 


마침, 한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달이 내일부터 시작되네요. 한해를 돌아보고 싶고 새해를 새마음으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죠. 내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나의 사건들, 생각들, 감정들, 관계들을 돌아보면서, ‘나의 한해는 어떤 이야기들로 쓰여져 있는가, 나는 그 속에서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가족들 앞에서 아이들 앞에서 솔직하면서도 진중하게 나눌 수 있다면, 한해의 마무리를 내 손으로 잘 맺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은 한달, 그렇게 내 손으로 나의 시간을 매듭지으며, 새로운 시간과 새 마음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이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나를 조종하는, 나의 느낌들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는 소용돌이를 감지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개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력이나 의식되고 있는 내적 이력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과 감정과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자아상에 도달하여 그 자아상과 합일을 이루려 하는 사람은 의식되지 않은 삶의 이력을 꿰뚫어 보는 작업을 시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자기 인식에 걸림돌이 되는 내적 강박과 자기기만을 해결할 수 있지요. 자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투명한 정신적 정체성을 형성해주고, 이를 통해서라야만 말 그대로 삶의 작가와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적인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p.17-18)


“비판적 물음을 통해서 익숙하던 생각의 패턴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검증 과정을 통해 생각의 주인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사고에 있어서 성숙해지고 자립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한다고 믿게끔 속이는 맹목적인 언어 습관에 대해 잠들어 있던 촉을 세우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각심은 두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p.19-20)


“우리가 감정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에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고무공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감정이 가진 권력을 우리 안에서 휩쓸고 돌아다니는 이물질로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긍정된 정신적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작업할 때 언어는 기억을 정리하게 해줍니다. 언어로 된 기억은 타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 셈이지요. 그런데 나의 이야기는 선택적이며 평가적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아상에 부합하도록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아상은 그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입니다.”(p.23-24)


“내적으로 일어나는 드라마가 개념적으로 투명하고 명확하게 변화하여 삶의 역사를 잘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경험과 의지를 더 이상 덮어두지 않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추진력이 발휘될 수 있고, 그 추진력이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의 다른 영역들과 연결되어 우리가 그것을 행위의 새로운 패턴으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경직된 구조를 허물고 새로운 경험과 의지의 형태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신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새로운 인식이 기존에 인식된 것에 개입하면서 자기 인식이 자기 결정으로 거듭납니다.”(p.52)


“자기 인식은 정신적 사실들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삶에서 서로 유의미한 연관성을 가능한 한 많이 부여해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의 발전이며, 그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도 이해하게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전이란 심층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고 창조해내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앞으로 진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게 만든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p.63-64)





posted by 무엇을 꿈꾸는가... 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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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66231677 2016.06.18 15:34  Addr  Edit/Del  Reply

    제 블로그도 놀러오세요~

2015.09.14 22:14 내면의 풍경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독일이 난민들을 받아들인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독일 통일과 관련한 기사가 있길래 또 읽었습니다. 독일은 대단한 나라구나, 생각했습니다. 부끄러운 나치의 역사가 있었지만, 지금 독일은 애쓰고 있구나... 느껴졌습니다.

 

난민 기사를 읽을 때마다 저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나라들의 선언을 접할 때마다 눈물이 울컥 치솟습니다. 


마침 오늘 이런 시를 읽었습니다.

 

 

 

<코스모스>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호주머니, 고향, 그간의 일들, 아버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난민의 이야기 위에 이 시를 올려놓고 읽자면, 내전을 피해 핍박받으며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이 그들의 신에게 억울함과 슬픔을 읍소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도 있습니다. 인생의 여러 고난을 맛본 사람들은 빼앗기고 상처받은 삶의 아픔을 떠올리며 언젠가 나에게도 쉼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이 시를 읽을지도 모릅니다. 고향은 실제 주소지가 있는 고향일수도 있고 마음 속의 고향일수도 있고 종교적인 그 어딘가일수도 있습니다. 아버님 역시 실제 핏줄을 나눈 아버지, 마음 속의 그 누군가, 종교적 대상 등 여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곱씹을수록 마음 한켠에 고인 눈물이 느껴진다면, 아마 인생의 고난을 경험해본 분들일겁니다.

 

그런데 저는 시가 주는 감동에서 비껴서 머뭇거립니다. 나는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인가,에 생각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피해는 주지 않고 사노라고 혹은 불법은 저지르지 않고 사노라고 자신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난민 기사를 읽으며, 또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이 치솟는 것은 나의 편협함과 너그럽지 못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 마음 한 켠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몰아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난민을 수용하지 못하는 국가들의 혼란과 고민, 난민을 수용하기로 했으나 수용 이후를 고민하는 정치인들과 국민들, 제 안에도 이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있습니다.

 

(20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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